티벳(Tibet)에 관하여 사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중국의 남서부, 인도의 북쪽, 히말리아 산맥과 쿤룬산맥(崑崙山脈:the Kunlun Mountains) 사이에 둘러싸인 고원지대. 18세기 이래 중국의 종주권(宗主權)밑에 있다가 제2차 세계대전 후 자치권을 얻음. 1965년에 티벳 자치구(自治區)로 됨. 해발 4,000m에 가까운 건조한 고원지대를 이루고 잇고, 메콩 강·양쯔 강 등은 이곳에서 발원함. 농업·목축업을 주로 함. 중심도시는 라사(Lhasa)』
『티벳-족(Tibet族): 주로 티벳 지방에 사는 종족. 티벳어를 사용하며, 농사를 짓는 단두(短頭)민족과 유목생활을 하는 장두(長頭)민족으로 나뉨. 서장족(西藏族)」
「티베토-버마 어족(Tibeto-Burma 語族):중국 티벳 어족의 하나. 동남아시아의 서반분(西半分)에서 통용되는 언어로, 티벳어·버마어를 비롯하여 가로어(Garo語)·보도어(Bodo語)·카친어(Kachin語) 등이 이에 속함』
『티벳어(Tibet語): 중국 티벳 어족 중의 티벳-버마 어파에 속하는, 티벳 어족의 언어. 문법상으로는 중국어에 가까우며, 문어(文語)와 구어(口語)의 구별이 뚜렷함. 서장어(西藏語).』
『티벳 문자(Tibet 文字): 인도계의 여러 문자를 모형으로 하여 7세기에 성립된 음절문자. 좌횡서로 통상 35자모를 기본으로 하는데, 모음자는 유일한 독립자인 a뿐이므로, 다른 모음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a의 아래나 위에 보조 기호를 씀』
티벳(Tibet:西藏)은 중국 서남부의 지역이다. 구(舊) 서강성(西康省)의 서반부를 차지하는 창도(昌都)지구를 합쳐서, 티벳 자치구 준비위원회의 관할 하에 있다. 북쪽은 신강(新彊)·청해(靑海)성, 동쪽은 사천(四川)성, 남쪽은 네팔(Nepal)·부탄(Bhutan)·인도 등에 접하고 있다.
주도는 라사((Lhasa)이며 지형적으로는 3지역으로 나누이며, 대체로 산악·고원·계곡지대가 많다. 중앙의 광대한 지역은 호소(湖沼:호수와 늪)가 많고, 습곡산맥(褶曲山脈)도 많으며, 주로 고지이나 기복은 완만하다. 우량은 적고 사막성(砂漠性) 초원이 많다.
티벳인은 티벳 버마어군(語群)의 티벳어를 쓰고, 인구는 남부의 농경지에 많으나, 북부와 동부에는 유목민이 많다. 습곡이란 지각에 작용하는 횡압(橫壓)으로 인해 지층에 주름이 지는 현상을 말한다.
주식은 보리 가루에 버터를 섞은 것이며, 사회기구는 장원제(莊園制)와 비슷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곳 티벳 문화의 근본은 라마교(Lama敎)문화이다. 라마교는 불교의 티벳화한 것으로서, 특히 13세기 이래 강하게 뿌리를 펴, 달라이라마(Dalai Lama:達賴喇嘛)를 종교와 정치의 왕으로 하여 독특한 정치와 종교 조직을 이룩하였다.
곳곳에 라마사원이 있고, 라마교문화가 왕성하다. 가옥은 티벳식의 독특한 석조건물이 많다. 교통은 라사를 중심으로 하고, 사방에 이르는 네 도로가 옛날부터 사용되어온 것이 근본(隊商路)이며, 근년에는 북평·아샘(Assam) 지방에 까지 항공로가 개통되었다.
인도에의 길은 매년 겨울에 다수의 티벳 대상(隊商)에 의하여 은성(殷盛)되고, 쌀·금속·가구·직물을 수입, 동불(銅佛)·선향(線香)·목제완(木宛)을 수출한다. 광산 개발은 다소 뒤떨어져 있으나, 금·은·구리·주석·붕사(硼砂)가 산출된다. 축산에는 양·염소·말·낙타·야크(yak) 등, 농산물로서는 맥류 등이 잇고, 공업은 아직 가내 공업적 단계이다.
티벳은 7세기경부터 정치적인 통일성이 나타났었는데 당시 중국에서는 티벳을 가리켜 토번(吐蕃)이라 하였다. 11세기이래, 티벳의 불교는 라마교(Lama敎)로 불리었는데, 그 때 원(元;蒙古)의 여러 황제는 라마교에 경도(傾倒)되었고 반면 중국 명태조(明太祖)는 라마중을 배척하였다.
청(淸)조는 정·부(正副) 2인의 주(駐 )티벳 대신을 파견하여 다스리게 하였었는데, 1750년에는 불의의 반란이 일어났었다. 또 이 반란은 곧 제7대의 달라이에 의하여 처리되었으니 청조는 도를 거듭하는 분쟁의 뿌리가 즁가리아(Dzungaria)에 있다는 것을 느끼고 결국 즁가리아와 티벳과의 왕래를 엄금하였다.
그리고는 4인의 대신을 달라이의 밑에 두고서 권력을 분산시켰으며, 인사(人事)는 모두 달라이(Dalai)와 대신의 회동(會同)에 의하여 결정하도록 하였다.
또 티벳의 귀족 세력은 달라이 밑에 통합되었고, 달라이는 티벳의 주권자로서 법왕적(法王的) 지위에 놓여 졌으므로 중국의 종주권(宗主權)은 이미 티벳에 확립되었다. 그때부터 북방으로부터의 몽고 등 세력에 의한 티벳의 정치적 불안은 여기에서 끝났으나, 18세기 후반으로부터는 인도를 통하여 영국 세력의 침투가 있었다.
그러나 13대의 달라이는 러시아의 세력도 받아들였으므로, 티벳에 있어서의 종주권의 동요에 놀란 청조는 군대를 투입하고서 일대 정치적 공작을 하였다.
1910년 달라이는 인도에 망명하여, 정책을 급회전시키고 친영(親英 )주의를 취하였으며, 때마침 일어난 신해(辛亥)혁명이 티벳군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그 후에 1913년의 심라(Simla)회의에서는 티벳은 중국의 종주권을 일절 부정하고 완전 독립을 주장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 국민정부는 티벳에게 자치권을 인정하였으나, 당시 중공정권은 1951년 군대를 보내어, 중공의 종주권(宗主權)을 인정하게 하였다. 그러나 1959년 4월에 달라이라마를 중심으로 한 반공 완전독립적 임시정부는 수행도중에 인도의 국경도시인 카림풍에서 드디어 독립을 선포하게 되었다.
이와 관련해서 티벳 건축(Tibet 建築)은 티벳민족, 즉 라마교도의 건축을 지칭한다. 주로 티벳·카시미르의 동부, 인도의 히말리아 지방, 몽고·만주·중국 등지에 분포되어 있다. 그 계통은 일부가 서방의 간다라에서 전래하고, 일부는 동방 중국으로부터 전래하여 상호 혼합된 것으로 추측되고 이것들 중에서 주요한 건축은 라마교가람(喇嘛敎伽藍)과 불탑(佛塔)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