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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체의 달인 르누아르와 목욕하는 여인들-인상주의

기사승인 2021.02.13  15: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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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경수 (사)전자정보인협회 회장

나경수 (사)전자정보인협회 회장

자연이 주는 순간적인 인상(印象을 포착하여 가지가지의 기교로써 이를 그대로 표현하려는 주의가 인상주의(印象主義)라고 할 수 있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기 보다는 사물이 작가에게 주는 순간적 인상을 표현하려는 예술상의 입장이 미술상의 인상주의라고 한다. 그러나 협의로는, 마네(E. Manet:1832~83)나 모네(C. Monet:1840~1926)로부터 시작되는 근대 회화(繪畵)운동을 가리킨다.

이 운동은 처음으로 1800년대에 프랑스에서 일어나 19세기 말기에 가장 성행했으며, 그 후 뒤이어 유럽 회화의 주류가 되었다.

마네의 ‘풀밭 위에서의 식사’가 관설(官設)살롱에 낙선한 것은 1863년의 일이었다. 그때 마네를 포함한 다수의 낙선을 둘러싸고 소장 미술가들 사이에서는 그 불공정을 불평·분개하였다. 이에 항의 단체를 결성하려는 기운이 높았다.

따라서 나폴레옹 3세는 그 항의의 정부(正否)를 공중의 비판에 맡기고 낙선 작품을 안듀스트리 궁전의 1실에 진열하는 기회를 주기로 하였다. 이것이 소위 <낙선화 전람회>가 그것이며 당시 세상에서 도외시된 화가들의 새로운 운동도 대체로 이때부터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이 전람회에 출품된 마네의 작품은 비록 그 착상(着想)이나 구도(構圖)를 옛 작가들에게서 빌린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전시된 당시에 풍기상의 문제에서 또 이 그림이 지니고 있는 종래보다 밝은 색조의 점에서 세인(世人)의 심한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마네가 계속해서 1865년의 살롱에 ‘오랑피아’를 출품하게 되어 가일층 심한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 이 마네의 작품에서 강한 자극을 받은 청년 화가들, 피사로(C. Pissarro:1830~1903)·모네·시슬레(A. Sisley:1839~99)·르느아르(P. A. Renoir:1841~1919)·드가(Degas)·달탱 라투르 등 라콩다빈 거리의 카페 게르보아에 모여서 마네를 중심으로 진지하게 새로운 회화를 논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1874년에는 그들 화가들에 의해 최초의 특별전이 나달 사진관에서 개최되었으나, <화가·조각가·판화가·익명협회>의 제1회 전람회라고 불리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때 출품된 모네의 작품 ‘인상-일출(日出)’의 제목에 따라서 미술기자 루이 르르와(L. Reroi)가 <인상파 전람회>라는 다소 냉소적인 기사를 《샤바리》지에 게재한 것이 인상파(Impressionisme)라고 하는 이름의 기원이다.

클로드-모네의 작품 [인상-해돋이(Impression Sunrise)]

제2회전은 1876년에 뒤랑 뤼에르 화랑에서 열렸다. 출품자는 새로 참가한 세잔(P. Cezanne:1839~1906)을 제외하고는 제1회와 거의 같은 사람들이었다.

다음해 1877년 제3회전을 열고, 이때부터 신운동의 화가들도 스스럼없이 <인상파>의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소위 최초의 인상파 작가는 모네·피사로·시슬레·르누아르 외에도 기요망(Guilloman)·바질·베르트 모리조·마리 카사뜨·니티스 등이다.

이들 중에서 참다운 인상파 기술의 창시자는, 누가 무어라 해도, 모네일 것이다. 한편 마네는 그 활동의 제1기를 통해서 오로지 현대의 정경을 묘사하는 일에 노력했다.

그러나 이때 이미 신기술자의 법칙이 모네에 의해 예상되었으며, 인상파의 단결이 차츰 강화됨에 따라 모네의 관념 및 제작에서 힌트를 얻었다. 때마침 마네의 예술적 생애는 제2기로 접어들었다.

넓은 의미에서 인상파에 속한다고 하는 작가로 가장 중요한 것은 르누아르 드가 등 2명이 있었으나 인상파 독특의 수법을 순순히 계속한 것은 오히려 모네·피사로·시슬레·기요망 등이다.

인상주의는 1880년대에서는 세력을 얻어, 결국에는 당시 화단의 강력한 주류가 되었다. 결국에는 당시 화단의 주춧돌이 되어, 그 영향은 널리 세계 각국의 근대 회화에 미치게 되었다.

프랑스 화가 르누아르(Renow, Pierre Auguste)는 라모즈 태생인데, 인상파 작가로서 화단에 나갖으나 훗날 프랑스 미술의 전통에 이어지는 독자적인 청신(淸新:맑고 새로운)한 작풍을 확립하였다.

풍부한 색채를 구사하여 관능미 넘치는 다수의 가작을 남겼다. 13세부터 도자기공장에서 근무하여 도자기 그림에 뛰어난 솜씨를 발휘했고, 1862년 글레아르의 아틀리에에서 정식으로 그림을 배웠다.

초기에는 쿠르베와 마네의 영향을 다분히 받았으나, 여기서 모네·시슬레 등과 알게 된 뒤 그들과 함께 인상파전을 창설하여 ‘판자 관람석’ 등을 출품했다.

1881년 이탈리아 여행 후, 고전적인 형태의 엄격함을 가미한 대작 ‘목욕하는 두 여인’을 제작했고, 만년에는 색채가(色彩家)로서의 천성을 살려 긴장감과 생명감이 약동하는 나부(裸婦)·꽃 등을 그려 불멸의 명성을 얻었다. 작품에는 ‘모자(母子)’, ‘조각(彫刻)’과 ‘나부’ 등이 있다.

나체화(裸體畫)는 인간 혹은 신·악파 등의 인간태(人間態)를 나체로 그린 그림이다. 전혀 옷을 입지 않은 전라(全裸)와 부분적으로 옷을 걸친 반라(半裸)가 있다.

나체화는 사회적 관습이나 종교관에 의존된 바도 있겠지만 육체의 미에 대한 찬미, 복잡 미묘한 동태·자태에 대한 미적 욕구에서 생겨났다고 한다. 원시시대부터 있었지만 유럽에서는 고대 그리스 이래 회화의 중요한 테마로서 꾸준히 발전해 왔다.

행복하고 평화로운 집안의 한 순간을 포착했다. 르누아르가 좋아하는 붉은색이 다양한 색조로 화면에 흐르고, 그림 속에서 사람들의 피부는 윤기가 흐르도록 생기가 느껴진다. 르누아르의 불후의 작품 세계를 총체적으로 특징짓는 야외에서 목욕하는 여인, 누드가 그것이다.

여성의 몸, 여체를 통해 아름다움을 다루는 누드는 동서고금을 통해 특히 서양미술사에서 약방의 감초처럼 끈질기게 빠지지 않는다.

그리스 미술은 르네상스 당시 이탈리아로 이어졌고 18~19세기 프랑스에서 다시 타오른다. 모순이나 잡념이 없는 순수한 이상세계 즉 우리의 이상적 낙원을 그렸다. 그의 누드 속에는 잡념이 없고 티 없이 맑은 자연 속에서 아름다움의 극치를 표현하고자 했다.

색상변화와 명암 차이로 입체감을 시현한다. 살결의 부드러움 감촉을 그려낸 ‘소파에 앉아 있는 누드’, 여체를 자연과 동화시키는 ‘목욕하는 두 여인’과 ‘바위에 앉아있는 목욕하는 여인’ 등 연인을 통해 그가 끊임없이 추구한 불마(不磨)의 그림들이 우리를 이끈다.

김영환 기자 yyy9137@naver.com

<저작권자 © 에너지타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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