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司馬遷;B.C.145~86)은 중국 전한(前漢)시대의 역사가인데, 자는 자장(子長), 태사공(太史公)으로도 존칭되었다.
생년은 B.C.145년과 B.C.135년의 두 가지 설이 있으나, 몰년(沒年)은 지금까지도 알 수 없다. 그의 생애는 대체로 한무제(漢武帝)의 치세(治世;B.C.141~B.C.87) 당시로 시종(始終)된다고 생각된다.
그는 하양(夏陽;협서성한성현(陜西省韓城縣) 출신으로 태사령(太史令;조정의 기록이나 천문담당)이란 관직에 있던 사마담(司馬談)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후에 무릉(茂陵;서안시북서(西安市北西)으로 적(籍)을 옮겼다.
어려서부터 고문(古文)으로 쓴 전적(典籍)을 즐겨 읽고 배웠으며, 또 전국을 수시로 주유(周遊)하면서 사적(史跡)을 찾아다녀 연구하여 이에 대한 견문을 넓혔다.
B.C.110년에 부친인 사마담은 무제가 태산(泰山)에서 거행한 봉선(封禪)의식에 참석이 허용되지 않았음을 한(恨)으로 여겨 고뇌 끝에 분사(憤死)하였다. 그러나 임종 시에 고대부터 당시까지의 역사를 저작(著作)하라는 유언을 사마천에게 마지막으로 남겼다. 여기서 봉선이란 흙을 봉하여 단(壇)을 모으고 하늘과 산천에 제사 지내는 일이다.
B.C.108년에 부친의 뒤를 이어 태사령(太史令)이 된 사마천은 먼저 역(曆)의 개정에 종사하여 B.C.104년에 태초력(太初曆)을 완성하자마자 부친의 유언을 따라 통사(通史)의 편찬에 착수하였다.
그런데 B.C.99년에 한(漢)나라 장군 이릉(李陵)이 흉노(匈奴)에게 패(敗)하여 포로가 되는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었다. 이 이릉의 처분을 결정하는 자리에서 일가(一家)몰살이라는 의견이 대다수를 차지하였으나 사마천만은 이릉의 충절(忠節)과 무용(武勇)을 칭찬하면서 극구변호를 했기 때문에 무제의 분노를 사서 궁형(宮刑:생식기를 없애는 형벌)에 처해졌다.
수년 후, 출옥하여 중서령(中書令)의 관직에 복귀하고 이제까지의 정신적 타격에도 굴하지 않고 전심전력을 다해 통사 저작에 경주하였다. 드디어 《사기(史記)》를 완성하였는데 이를 저술한 직접적인 동기는 부친의 유명(遺命)을 충실히 받든데 있다.
그러나 부친의 분사(憤死)와 집필하는 도상에서 이릉의 화(禍)는 인간의 운명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되었다. 하지만 사실(事實)의 정확한 검토를 통해서 인간의 종합적 가치를 결정하였고, 인과(因果)관계의 불합리성(不合理性)을 하늘을 대신하여 수정함으로써 역사학이 갖는 오묘하고 특별한 의미를 터득하고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그로 인해 《사기》중에서도 특히 열전(列傳)부분이 특히 이채(異彩)를 띄고 있으며, 《사기》와 함께 사마천의 이름을 불후(不朽)의 것으로 기록한 것이다. 당시 그의 심정과 역사에 대한 정열은 우인(友人) 임안(任安)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충분히 알아 볼 수 있다.
주지하는바와 같이 《사기(史記)》는 중국사람 사마천(司馬遷);B.C.145~B.C.86 또는 B.C.135~B.C.84)이 편찬한 사전(史傳)이다. 사전적 의미로 사기(史記)는 역사적인 사실을 적어놓은 즉 역사를 기록한 책으로, 사서(史書)·사승(史乘)·사적(史籍)·사책(史冊)이라고도 한다. 또 사전(史傳)은 사적역사와 전기 또는 역사에 전해진 기록을 의미한다.
130권의 이와 같은 방대한 《사기》는 본래 《태사공서(太史公書)》라고 하였으며 위(魏와) 진(晋)이후에는 《사기》라 불렀다. 정사(正史) 또는 기전체(紀傳體)의 사서의 원조로서 위로는 황제(黃帝)부터 아래로는 한무제(漢武帝)의 원수(元狩) 원년(B.C.122년)에 이르기까지의 전반적인 사건이 12본기(本紀), 10표(表), 8서(書), 30세가(世家), 70열전(列傳)의 130편으로 세밀하게 나누어 방대하게 기술되고 있다.
태사(太史)는 옛날 중국에서 기록을 맡아 보든 관리이고, 공서는 공문서(公文書)로 공무원이 그 직무상(職務上) 작성한 서류로 공식 서면(書面)을 말한다. 또 정사(正史)는 정확한 사실의 역사라는 뜻으로, 기전체(紀傳體)에 의한 중국 역대(歷代)의 역사로, 비사(秘史)와 대칭이 된다.
비밀히 감추어 둔 역사가 비사인데, 세상에 알려지지 아니한 이면사(裏面史)를 말한다. 그리고 기전(紀傳)은 본기(本紀)와 열전(列傳), 어떠한 사람의 전기(傳記)를 적은 기록이다. 또 기전의 체재(體裁)에 의하여 기술(記述)하는 역사 편찬의 한 체재가 기전체(紀傳體)이다.
본기(本紀)는 제왕의 흥망을 적었고, 표는 세계연표, 서는 예악(禮樂)제도, 세가는 춘추전국의 제후 및 한(漢)의 왕족과 공신으로서 왕후로 봉해진 사람들의 일, 열전은 그 밖의 중요한 인물을 자객(刺客)·순리(循吏:규칙을 잘 지키며 열심히 일하는 관리)·유림(儒林)·혹리(酷吏)·유협(遊俠:협객)·영행(佞倖)·골계(滑稽)·일자(日者)·구책(龜策)·화식(貨殖:재화를 늘림)등으로 분류해 적었다.
사마천은 이 책을 쓰면서 모든 고금의 문헌을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기록에 있는 것 이외에도, 자기의 견문(見聞)에 의하여 확실하다고 믿는 것을 대담하게 잡아넣어 각 인물을 생생하게 부각(浮刻)시키고 있다.
자료는 옛날 것 일수록 적고, 현대에 가까울수록 많고, 또 예와 지금과의 기술형식에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략 시대가 내려옴에 따라 묘사된 인물의 리얼하고 더욱 생생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사마천의 《사기》에서 정수(精粹)를 뽑은 책이 《사기영선(史記英選)》이다. 조선조 정조20년(1796)에 출판하였다.
1권에 항우본기(項羽本紀)와 소상국(蕭相國) 유후(留候)등의 세가, 2권에 백이(伯夷)·관중(管仲)·안영(安榮)·오자서(五子胥)·소진(蘇秦)·맹상군(孟嘗君)·평원군(平原君)등의 전(傳), 3권은 신릉군(信陵君)·범휴(范睢)·악의(樂毅)등의 전, 4권은 회음후(淮陰侯)·육가(陸價)등의 전, 5권은 위기후(魏基侯)·무안후(武安侯)·관부(灌夫)·이장군(李將軍) 및 자객·유협(遊俠)등의 전(傳)으로 구성 되어 있다.
이어 6권 화식전(貨殖傳) 및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 7권은 소무(蘇武)·이능(李陵)·흉노·곽광(霍光)·하우승(夏俁勝)등의 전(傳). 8권에는 위상(魏相)·병길(丙吉)·조충국·매복 등의 전(傳)으로 세세하게 기술 되어 있다.
전(傳)이란 중국에 있어서 경(經)의 주석(註釋), 또는 해설을 말한다. 《서경(書經)》에 공안국(孔安國)이 붙인 주석을 ❰공전(孔傳)❱이라 하며, 모장(毛萇)의 《시경(詩經)》의 주를 ❰모전(毛傳)❱이라 한다. 원래 전은 전기(傳記), 한 개인의 일평생의 사적(事跡)을 말한다.
또는 《역경(易經)》에 붙어 있는 〈단전(彖傳)〉 〈상전(象傳)〉이하의 즉 《십익(十翼)》 《춘추(春秋)》에 붙었던 〈좌씨전(左氏傳)〉 〈공양전(公羊傳)〉 〈곡량전(穀梁傳)의 삼전(三傳) 등은 간단한 자구의 해석이 아니다. 전자는 《역》의 특수한 상징의 의미의 해설로서 철학적 이론이며, 후자는 독특한 역사 기술법 〈춘추의 필법〉에 따라 쓰여 진《춘추》에 대한 그 이면의 사실(史實)을 예를 들어 거기에 해설을 붙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