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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과 서안

기사승인 2020.09.01  10: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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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경수 (사)전자정보인협회 회장

나경수 (사)전자정보인협회 회장

장안(長安)은 중국의 섬서성(陝西省) 위수(渭水)의 남안, 지금의 서안(西安) 북서 10㎞쯤에 있는 구도(舊都)다. 전한(前漢)이래 당(唐)의 소종(昭宗)까지 가끔 나라의 수도가 되었다. 특히 한·당시대에 번영하였고, 이후에는 지방도시가 되었다.

당나라 때의 장안은 수의 문제(文帝)가 지은 대흥성(大興城)을 고쳐 쌓았다. 당의 극성기에는 인구 100만이 넘는 활기찬 세계적 도시로서 외교사절·유학생·상인 등 외국인만도 수천 명이 있었다고 전한다.

성내에 천복사(薦福寺)·소안탑(小雁塔)·자은사(慈恩寺)·대안탑(大雁塔)·분묘 등과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가 있다. 부근에 현장삼장탑(玄獎三藏塔), 향적사(香積寺) 전탑(塼塔;흙벽돌로 쌓은 탑), 진시황제능(秦始皇帝陵), 곽거병묘(霍去病墓) 등의 고적(古蹟)도 있다.

서안(西安)은 중국 요동성(遼東城) 북부의 도시이다. 사매(四梅)철도의 중심지이고 부근에서 고량(高粱)·콩을 집산한다. 또 하나의 서안은 중국 섬서성(陝西省)의 성도(省都)인데, 구명(舊名)은 장안(長安) 혹은 호경(鎬京)이다. 중국 6대 고도(古都:옛 도읍)의 하나로 주(周)~당(唐)시대 천여 년 간의 왕도(王都)였다.

위수(渭水) 분지의 중심지이며 형세가 험요(險要:지세가 험하여 방어하는 데에 주요한 곳)하고 수리(水利)가 발달되어 있다. 정치·경제·교통·문화의 중심지이며 서북 최대의 상업교역지로 가장 부유한 지대를 이룬다. 공업은 방직·모직·시멘트 등이 있고 시내·외에 사적이 많다.

서안비림(西安碑林)은 중국 서안의 문묘(文廟) 뒤쪽에 모아놓은 석비군(石碑群)이다. 송나라의 여대충(呂大忠)이 개성석경(開成石經), 현종황제(玄宗皇帝), 어주효경비(御註孝經碑), 안진경(顔眞卿) 등의 석비를 세운 데에서 시작하였다.

명·청대에 수차 수리를 하여 당·송이후 근대까지의 석비와 저명한 서가(書家)의 법첩(法帖:습자(習字)의 본보기나 감상용으로 선인(先人)의 필적을 모사(模寫) 또는 임사(臨寫)한 책)을 석각(石刻:돌에 글)한 것을 500여개를 모았다.

역사적으로 서안사건(西安事件)은 1936년 12월 당시 중공 공격을 독찰(督察)중인 장개석(蔣介石, 장제스:1887~1975)을 꾀어 장학량(張學良, 장쉐량:1898~?) 등이 서안에서 그를 감금한 사건이다. 내전정지(內戰停止)·국공합작(國共合作)·항일(抗日)민족통일 전선결성의 전기(轉機)가 되었다.

국공합작은 중국에서, 혁명의 수행 또는 일본의 침략에 대한 투쟁을 위하여 국민당과 공산당이 일체 연합한 일이다. 제1차는 1924~27년, 제2차는 1937~45년까지 계속되었다. 원래 장안(長安)은 수도(capital)라는 뜻으로 ‘서울’을 일컫는 말이다. 사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중국 산시 성(陝西省)의 시안 시(西安市)의 옛 이름. 한(漢)나라·당(唐)나라가 도읍했던 곳임. 뤄양(洛陽)에 대하여 서도(西都) 또는 상도(上都)라고도 불렀음」

「시안(西安):중국 산시 성(陝西省)의 주요 도시. 예로부터 한민족 활동의 중심지로 부근에 주(周)·진(秦)·한(漢)·수(隋)·당(唐)나라의 도읍이 있었음. 서안」

수 문제(文帝) 양견(楊堅)은 북주(北周)를 멸망시키고 전국을 통일한 뒤 중앙집권적 봉건 왕조를 세웠다. 그는 장안성 동남쪽에 궁성(宮城:궁궐을 둘러싼 성벽)과 민간인을 위한 거주 구역을 분리한 대흥성을 만들었다. 하지만 수 왕조가 2대만에 단명하는 바람에 이후 당이 이곳을 수도로 삼아 장안성으로 불렀다.

중국의 주례(周禮) ‘고공기(考工記)’에 따르면 장안은 각 면에 3개의 문이 있고 도성 안에는 가로 세로로 각각 아홉 갈래씩, 길이 나 있었으며 왕궁 왼쪽은 종묘, 오른쪽은 사직이었다. 이후 역대 중국 왕조는 물론이거니와 조선시대까지 이어진 종묘사직은 원형이었다.

장안은 또 평면도로 볼 때 좌우 대칭이 확연했다. 관청이 모인 황성(皇城:황제 나라의 도성) 대문에서 도성의 남문인 명덕문까지 뻗은 주작대가(朱雀大街)가 남북의 중심축이었다. 주작대가의 동서 양쪽으로 각각 54개의 방(坊:서울의 세부 구획, 오늘의(洞)과 비슷함)이 있고, 동시(東市)와 서시(西市)가 있었다.

이러한 구조는 지상의 황권을 구현하는 궁성의 의미를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거주하는 인구는 총 100만 명에 달했다고 추정된다. 성안에 8만여 호가 살았는데 호마다 8명 내지 10명이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 군대병력과 승려를 합치면 100만 명 가까이 된다.

장안은 당시 그 지역에 살고 있던 20여 만 명의 농민들이 9개월에 걸쳐 터를 완성했다. 수양제를 거쳐 당 초기까지 도시 건설은 매우 계획적으로 진행되었다. 장안은 후대의 도시계획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송(宋)의 동징(東京), 원(元)의 다두(大都)가 장안의 영향을 받았으며 심지어 옛 일본의 도읍인 헤이조쿄(平城京:나라)와 헤이안쿄(平安京:교토)가 역시 장안을 따랐다.

김영환 기자 yyy9137@naver.com

<저작권자 © 에너지타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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